2014년 1월 8일 수요일

피폐화



칙칙한 색의 패딩, 커다란 백팩에 어깨를 푹 수그리고 종종걸음치면서 지나가는 스테레오타입들. 다들 안색이 나쁘다.

2014년 1월 5일 일요일

회고


2008년은 수험공부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역 근처에 있던 모 학원은 모교 졸업생들이 많이 선택하던 곳이었다. 상담하러 가서 성적 명단을 보니 아는 이름이 한둘이 아니었다.

늦봄부터 인터넷에서는 광우병 이야기가 퍼졌고, 시청 앞 광장에서는 소규모 촛불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주로 이글루스 포스팅을 통해 광우병에 대한 여러가지 글을 접했다. 반론도 이오공감을 통해 읽었다. 내 습성에 따라 모든 것을 읽고 내린 나름의 결론은, 가능성은 있지만 발생 확률이 극히 낮다는 것이었다.

광우병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한국 정부의 대응은 아주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꾸준히 진행되고 있던 소규모 집회는 pd수첩을 계기로 대규모화되었고, 졸속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처리과정과 정부관료의 안이한 기자회견 내용이 불을 붙였다. 또 하나, 초기 시위들은 매우 소규모였으나 블로그와 인터넷 뉴스를 통해 심한 진압 장면이 생중계되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현장으로 뛰어나가는 양상을 보였다.점점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갔다. 내 경우에 결정적이었던  장면은 전경이 저항하지 않는 한 여성을 짓밟는 장면이었다. 광우병의 공포보다도 직접적인 충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공격할 의사도 능력도 없어보이는 한 사람을 집회 참가자라는 이유로 폭행한다는 사실. 

집회는 이를 계기로 점점 더 거세어졌다. 학원에서 시위장소까지는 걸어서 30분은 걸렸지만, 그 여름 가장 큰 시위가 있던 날은 학원에서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반 남학생 둘이 집회에 같이 가자고 말했을 때, 나는 한참을 우물쭈물한 끝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떠난 후 마음을 바꾸었다. 홀로 짐을 챙겨 시청 앞으로 향한 것이다.

완전히 동일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시위대와 행동을 함께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슨 배후가 있거나 종북이라서 시위에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고, 더 많은 사람 수로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대한민국에 종북이 이렇게 많다니...'로 반응한 것 같다.)

대단한 인파였다.동화면세점 앞 대로에서 시위대에 끼려고 기웃거리던 나를 공교롭게도 아까의 두 남학생이 발견해주었다. 나는 겸연쩍어하며 그들 옆에 앉았다.

최대의 시위. 이른 저녁인데다 인파가 워낙 많아서 경찰들은 손을 대지 못했다. 인파에 비하면 자그마한 무대에서 초대가수가 노래를 하고 국회의원이 덕담을 했다. 그것은...그러니까ㅡ, 아주 맥 빠지는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mb 퇴진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어쩐지 맥이 빠졌다. 내 성격의 탓도 있겠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들어본 결과 그런 무기력감은 나만 느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칼자루는 정부가 쥐고 있었다. 시위대는 어디론가 가고자 했지만 아무데도 가지 못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차벽과 경찰을 뚫고 간다고 해도 어디에 도달할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나섰지만, 그것만으로 뭔가 바뀌지는 않았다. 정부가 너그럽게 받아들여주어야만, 뭔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등장했던 'MB 퇴진'이라는 구호는 희극적이었다.

시위에 참가한 다음날, 나는 역 가판대에서 신문을 두 부 샀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이었다. 거기에는 완벽하게 분리된 두 세계가 있었다. 한 신문은 서울 도심에 나타난 거대한 폭도(!)의 집단을 묘사하였고 또 한 신문은 대안적 민주주의의 새 장이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직접민주주의니 대안적 민주주의니 하는 말에 냉소적인 것은 이 때의 경험 탓이다.) 우리의 상황은 둘 중 어느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시위대는 정치인들을 싫어했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나타났을 때 참으로 싫어하던 시위대의 모습이 기억난다. 우리는 "정치적이지 않아야" 했다. 시위대에 일종의 지도부가 생기는 것도 달갑지 않아 했다. 나도 그랬다. 일종의 강박관념이었다. 우리는 순수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정치적 요구를 하면서 정치적이지 않아야 했던 딜레마.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이라는 것은 상당한 멸시를 각오하는 일이다. 일베도 노빠도 깨시민도 마찬가지다.  정당성, 진정성이라는 뽕에 취하지 않으면 정치적이기 어렵다...그리고 뽕에 취한 극단주의자들이 다시 정치혐오를 조장한다. 도돌이표.

나는 곧 학원을 그만두고 집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서울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고 신문 기사를 통해서만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시위는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렇지만 시위대가 사라져도 전경버스로 된 긴 벽만은 꽤 오래도록 그 곳에 남아있었다.

며칠 고민해보았지만 아직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할 깜냥이 안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시위의 가장 큰 영향은 우파의 공포를 자극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국정원 댓글 사건이나 종북 몰이로 이어져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들어 회고를 해 보았을 뿐이다.

[독서] 12월에 읽은 것들 - 호수의 여인 외

호수의 여인 The Lady in the Lake, 안녕 내 사랑 Goodbye My Lovely
레이먼드 챈들러
북하우스

<호수의 여인>은 레이먼드 챈들러를 시리즈로 읽는 중에 순서를 모르고 집어든 책. 전적으로 챈들러가 조성하는 분위기와 필립 말로의 매력이 힘이다. <안녕 내 사랑>에서는 말로의 의외의 연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말로와 덩치 큰 전직 경찰이 풍기는 오묘한 분위기는 나의 후죠시각 때문만은 아니렸다.


대리전
듀나
이가서

2006년 작. 대리전이라는 중편소설과 그 외 몇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 조선일보에 칼럼 연재하던 시절 알게 되긴 했으나, 잡지 판타스틱이나 웹진 수록작 말고는 별로 읽어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읽은 것들도 대부분 재미있었고, <대리전>도 좋았다. 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고 싶어할까? 라는 의문에 설득력 있는 대답인 듯.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매튜 A. 크렌슨/벤저민 긴스버그
후마니타스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민주주의가 시민을 소비자화하고 주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납세와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던 '주인'들은 이제 그 힘을 잃고 정부 서비스의 단순한 수혜자가 되어가고 있다. 시민 참여의 기회들은 참여의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자원이 있는 시민들만 참여할 수 있게 하여 참여를 극소화시켰다.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정부에 접근하게 되며 집단 동원의 유인이 줄어들게 되었고, 따라서 자원이 없는 계층은 완전히 소외된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소송을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민을 동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시민들은 엘리트들이 그들을 더이상 동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에 주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민영화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시장 메커니즘은 대중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공공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책임을 모호하게 하고, 집단적 목표를 분절된 조각들로 나누어 놓는다." 민영화된 시설은 서비스의 질을 낮추어 이윤을 높이려는 유인을 갖는다. 민영 교도소들은 수감과 처벌이 가혹하고 길며, 민영 교도소 운영 회사들이 수감 기간을 늘리려는 로비를 하고, 인력부족으로 인한 폭력충돌이 더 잦다고 한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
야스다 고이치
후마니타스

일본의 넷우익 단체, "재특회"를 취재한 내용을 담은 얇은 책이다. 일종의 풀뿌리 운동으로서 거리에 나온 이들은 실은 평범한 사람들로, 재일 조선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연대감을 느끼고 인정감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진실에 눈을 떴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좌익 세력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인 학교 앞에서 욕설을 하는 행위는 일본인이 '차별받고 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도된 피해의식은 실은 최근 세계 도처에서 흔히 목격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뿌리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잊기 전에 메모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