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5일 목요일
"유언비어"보도에 대한 단상
최근의 혼란에 유언비어 탓하는 정부와 언론이 많다. 유언비어, 즉 근거 없는 뜬소문은 분명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유족에 상처를 준다. 고로 언론은 유언비어를 모아 보도하며 비난하고, 정부는 이를 엄히 처벌하려 한다.
희생자를 모욕하는 일베 게시글을 굳이 캡쳐하여 보도한 YTN과 온갖 유언비어를 긁어모아 비난하기 위해 보도하는 tv조선의 예를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언비어 전파의 제1통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유언비어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입을 선제적으로 막을 수 없다면, 그런 소리를 거르고, 그 파급효과가 큰 것은 검증하여 의혹을 푸는 것이 언론의 역할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상대를 공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언비어들을 한데 모아 보도함으로써 역으로 유언비어들에게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런 조리돌림은 인터넷 기사 말미에 붙는 '네티즌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네티즌 의견'이 사실 언론사의 '우리 의견'이고, 이런 조리돌림의 대상은 '쟤들의 의견'인 것 뿐이다.
가치 없는 의견에 왜 전파를 낭비하는 것일까?
2014년 4월 22일 화요일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정약용
"편지 한장 쓸 때마다 두번 세번 읽어보면서 이 편지가 사통오달한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본 뒤에야 비로소 봉해야 하는데, 이것이 군자가 삼가는 바다."
SNS의 시대에 재조명되어야 할 말씀이다.
2014년 3월 16일 일요일
쓰레기통 모형(Garbage can model)과 트켓몬(Twitch plays pokemon)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쓰레기통 모형이 뭐야?" "트켓몬이 뭐야?" 둘 중에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참 묘한 소재지만 요새 공부하며서 짬짬이 트켓몬 밈을 따라잡다 보니 이런 이상한 걸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트켓몬은 twitch plays pokemon의 약자로, 접속자들이 채팅에 입력한 커맨드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켓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임방송이다. 시청자 수가 만 단위에서 십만 단위를 넘나드니 실제 채팅 참가자 수가 1%만 되어도 게임의 진행은 혼돈 그 자체일 수밖에. 심지어 몇 시간 동안 회복 하나를 못하고 마을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니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어려운 부분에서 쓸 수 있도록 democracy라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한다. 일정 시간 동안 입력을 받아 가장 높은 투표를 기록한 커맨드를 실행하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democracy로 모든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입력과 실행간 시차 때문에 상당한 인내심과 예측, 협력을 필요로 한다.)
자 그러면 쓰레기통 모형이란 무엇인가. Garbage Can Model은 조직의 구성단위나 구성원 사이의 응집성이 아주 약한 혼란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의 특징을 강조하는 모형이다. 이러한 혼란상태를 조직화된 무정부상태-organized anarchies라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의사결정이 쓰레기들이 마구 엉켜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쓰레기통 모형이다.
쓰레기통 모형에는 세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문제성 있는 선호(problematic preferences)이다.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트켓몬 플레이어들 간에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합의가 없다. 그리고 각 개인들조차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 pc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난관을 민주주의로 돌파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상시적으로 발생한다.
둘째, 불명확한 기술(unclear technology)이다. pc에서 썬더를 꺼내오려면 무슨 연속 커맨드에 투표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딜레이나 커맨드가 먹히는 속도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계속 시도해 볼 수밖에 없다. 목표가 명확하더라도 최선의 수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수시적 참여자(part-time participants)이다. 플레이어들은 언제든지 게임에 참여할 수 있고 언제든지 접속을 종료할 수 있다. 그나마 트켓몬의 플레이어 집단은 대규모라 이런 측면이 의사소통의 장애물로 부각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 경우 의사결정은 문제가 있다->해결책을 찾아보자->사람 모아서 회의하자->통과!가 아니라, 문제의 흐름, 해결책의 흐름, 참여자의 흐름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다가 기회가 있으면 갑작스레 해결책이 채택되는 식이다.
이러한 무정부상태에서 의사결정이 일어나려면 점화계기(triggering event)가 필요한데, 예를 들어 pc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파오리 Dux가 실수로 방생되는 이벤트가 발생하면 충격을 받은 모두가 힘을 모아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방식은 주로 1. 진빼기 결정(choice by flight): 관련된 문제들이 스스로 다른 기회를 찾아 떠날때까지 기다리기, 2. 날치기 통과(choice by oversight)인데... 트켓몬이 대부분 미국 시간으로 새벽, 사람 없는 시간대에 진행이 빠르다는 점에 부합한다...
지금 이 시각, 트켓몬은 레드버전에 이어 크리스탈 버전을 클리어한 상태이다. 이들은 하나의 종교를 세우고 그 신들과 다시 싸워 이기는 서사를 성립시켰다. 그것만으로도 참여자 모두는 성공한 것이다. 그렇지만 게임 자체의 스토리라인이나 퍼즐이 이미 존재하는 해답을 돌파해나가는 것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몇 명의 참가자가 채팅이나 레딧 등에서 다른 이들을 리드해줄 수 없었다면?
2014년 3월 13일 목요일
2014년 3월 4일 화요일
으아아.
스타트렉 tos return of the archons 존좋. 왜 행성 컨셉이 저런지는 모르겠는데 크루들이 정장입고 빔다운하는 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다. 소재는 육체는 그대로 둔 채 인간들의 의식을 통합하여 선하게 만드는 기괴한 유토피아. 아직 끝까지 못 봄.
앨저넌에게 꽃을 장편은... 찰리 고든이라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과 성장하면서 겪는 사춘기적 고통, 퇴화의 과정을 추가한 내용이었다.
흠, 여초 커뮤니티의 외부에 대한 강박적 공포감 혹은 혐오. 과하단 생각이 든다. 단순히 문을 걸어닫는 정도가 아니라 언급조차 못하게 하거나 분노를 만만한 대상에게 쏟아낼 때.
마음을 다잡아야지.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잡담 2014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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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오면 폐허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기분이 들어 매우 편안하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잠시 트위터도 휴면. 가끔은 강박적으로 타임라인을 읽는 내가 너무 피곤하다. 나는트위터에서 무의미한 데이터 스트림이 되는 감각을 무척 좋아하니까, 곧 다시 돌아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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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며칠 연체하는 바람에 도서관 대출을 2월 내내 정지당했다. 제때제때 반납할 걸. "앨저넌에게 꽃을" 장편 버전 빌리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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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치와 레딧을 돌아다니고, 스타트렉을 아껴 보고, 팬픽을 읽으면서, 여전히 웹생활은 보람찹니다...
2014년 1월 8일 수요일
2014년 1월 5일 일요일
회고
2008년은 수험공부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역 근처에 있던 모 학원은 모교 졸업생들이 많이 선택하던 곳이었다. 상담하러 가서 성적 명단을 보니 아는 이름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단한 인파였다.동화면세점 앞 대로에서 시위대에 끼려고 기웃거리던 나를 공교롭게도 아까의 두 남학생이 발견해주었다. 나는 겸연쩍어하며 그들 옆에 앉았다.
나는 곧 학원을 그만두고 집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서울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고 신문 기사를 통해서만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시위는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렇지만 시위대가 사라져도 전경버스로 된 긴 벽만은 꽤 오래도록 그 곳에 남아있었다.
며칠 고민해보았지만 아직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할 깜냥이 안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시위의 가장 큰 영향은 우파의 공포를 자극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국정원 댓글 사건이나 종북 몰이로 이어져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들어 회고를 해 보았을 뿐이다.
[독서] 12월에 읽은 것들 - 호수의 여인 외
레이먼드 챈들러
북하우스
<호수의 여인>은 레이먼드 챈들러를 시리즈로 읽는 중에 순서를 모르고 집어든 책. 전적으로 챈들러가 조성하는 분위기와 필립 말로의 매력이 힘이다. <안녕 내 사랑>에서는 말로의 의외의 연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말로와 덩치 큰 전직 경찰이 풍기는 오묘한 분위기는 나의 후죠시각 때문만은 아니렸다.
대리전
듀나
이가서
2006년 작. 대리전이라는 중편소설과 그 외 몇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 조선일보에 칼럼 연재하던 시절 알게 되긴 했으나, 잡지 판타스틱이나 웹진 수록작 말고는 별로 읽어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읽은 것들도 대부분 재미있었고, <대리전>도 좋았다. 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고 싶어할까? 라는 의문에 설득력 있는 대답인 듯.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매튜 A. 크렌슨/벤저민 긴스버그
후마니타스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민주주의가 시민을 소비자화하고 주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납세와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던 '주인'들은 이제 그 힘을 잃고 정부 서비스의 단순한 수혜자가 되어가고 있다. 시민 참여의 기회들은 참여의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자원이 있는 시민들만 참여할 수 있게 하여 참여를 극소화시켰다.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정부에 접근하게 되며 집단 동원의 유인이 줄어들게 되었고, 따라서 자원이 없는 계층은 완전히 소외된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소송을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민을 동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시민들은 엘리트들이 그들을 더이상 동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에 주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민영화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시장 메커니즘은 대중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공공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책임을 모호하게 하고, 집단적 목표를 분절된 조각들로 나누어 놓는다." 민영화된 시설은 서비스의 질을 낮추어 이윤을 높이려는 유인을 갖는다. 민영 교도소들은 수감과 처벌이 가혹하고 길며, 민영 교도소 운영 회사들이 수감 기간을 늘리려는 로비를 하고, 인력부족으로 인한 폭력충돌이 더 잦다고 한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
야스다 고이치
후마니타스
일본의 넷우익 단체, "재특회"를 취재한 내용을 담은 얇은 책이다. 일종의 풀뿌리 운동으로서 거리에 나온 이들은 실은 평범한 사람들로, 재일 조선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연대감을 느끼고 인정감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진실에 눈을 떴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좌익 세력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인 학교 앞에서 욕설을 하는 행위는 일본인이 '차별받고 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도된 피해의식은 실은 최근 세계 도처에서 흔히 목격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뿌리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잊기 전에 메모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