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1일 금요일

Kepler-16b



두 개의 해를 가진 행성 Kepler-16b.
가스로 되어 있는 행성이고, 무척 추운 곳이라는군요.

잡담, 8월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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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송 랜덤재생은 쇤베르크와 퀸, 소녀시대를 넘나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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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라면, 케잌, 과자, 있는대로 다 먹어도 배가 고프다. 이렇게 식욕이 넘친 적은 태어나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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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된 글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독서량이 저절로 늘어난다. 그러나 다른 의욕은 여전히 없다. 해야 할 최소한의 공부만 하고 무기력하게 앉거나 누워서 시간을 보낸다. 벽지 무늬를 비스듬하게 올려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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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중: 신들의 사회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감상] 기프트

[기프트] (어슐러 K. 르 귄,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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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에 따라 주술의 힘을 물려받는 여러 부족들이 고원에 모여 가난하게 살고 있다. 대상의 내부를 파괴하는 힘을 지닌 혈통을 지닌 소년은 나이가 차도록 능력이 각성하지 않아 고민. 그런데 갑작스럽게 각성한 능력은 지나치게 강력해서, 소년은 능력의 발현 통로인 눈을 봉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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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말에 의하면 잘못된 재능을 타고난 소년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고. 성장담 자체는 특별할 것 없지만, 쇠락해가는 한 부족과 마술적인 능력의 존재에 대한 설득력있는 전달 덕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된 듯. 


-표지


영어덜트 대상 책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지를 했다...고 하기엔 마케팅적으로도, 내용과 조화 축면에서도 실패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동인녀 대상 판타지 BL이었다면 환영할만한 표지겠지만 아니잖아? 만약 청소년 대상이라면 '학부모가 아이들에게 사주고 싶어지는 책 표지' 컨셉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싶지만... 
근데 미국 표지도 없어 뵈긴 하더라.




P.S.
주인공은 예쁜 여친도 있고 재능도 있는데 정말 부럽다...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잡담 2012.08.29

- 텀블러를 써야 하는 건감.. 남의 그림 관음해서 별통에 모으는 용도로만 쓰고 있었는데 텀블러에서 블로그 쓰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집착.

- 밖에 나가고 싶은데 귀찮아 죽을 것 같다.

- 읽고 있는 책: 기프트, 신들의 사회(세 번째 시도),

[감상] 보트 위의 세 남자, 부르주아전

[보트 위의 세 남자] (제롬 K. 제롬, 문예출판사, 2004)
[부르주아전傳-문화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피터 게이, 고유경 옮김, 서해문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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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위의 세 남자]는 세 남자와 개 한마리의 보트 여행을 그리면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각종 우스운 에피소드를 나열해가는 소설이다. 심심할 때 야금야금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었다. 

내가[보트 위의 세 남자]를 읽게 된 것은 전적으로 코니 윌리스가 [보트 위의 세 남자]를 소재로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썼기 때문이다. 코니 윌리스는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첫머리에 "[우주복 있음, 우주 출장 가능함]의 작가이며 내게 처음으로 제롬 K. 제롬의 [보트 위의 세 남자,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소개시켜 준 로버트 A. 하인라인에게"라며 하인라인에게 다시 공을 돌린다. 그러므로 제롬 K. 제롬에서 시작하여 하인라인을 거쳐 코니 윌리스로 이어진 고리의 시작으로 거슬러올라가 본 셈이었다.

[부르주아전]은 추천받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의 일상사를 그려낸 책이었다. 사실 남의 일기장 들여다보는 기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딱딱한 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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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사실은 [보트 위의 세 남자]가 빅토리아 시대 작품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 책의 저자 제롬 K. 제롬은 1859년에 태어나 1927년에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부르주아전]에서 분석하고 있는 대상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생몰년도(1862~1931)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부르주아전]은 [보트 위의 세 남자]를 짧게 인용하고 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런 훈계를 살짝 비꼰 사람도 있었다. 영국의 유머작가 제롬(Jerome K. Jerome)은 1889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노동을 좋아한다. 그것은 나를 매혹시킨다. 나는 몇 시간이든 앉아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농담조차도 빅토리아 시대에 이 불굴의 신념이 내포했던 능력에 대한 찬사다.(부르주아전, 254-255p)

참고로 문예출판사의 [보트 위의 세 남자]에서 이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 생각에 나는 항상 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일을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 나는 몇 시간 동안이고 자리에 앉아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내 곁에 두고 싶어한다. 누군가 나에게서 그것을 뺏어간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중략)
나는 내 일에 매우 주의를 기울인다. 내 곁에 두는 어떤 일들은 몇 년 동안 내 소유였고 지문 자국 하나 없다.
(중략)
하지만 내가 일을 끔찍이 좋아한다고는 해도, 나는 공명정대한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게 할당되어야 할 정당한 양 이상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다.(보트 위의 세 남자, 211-212p)

겉보기에 제롬은 <빅토리아인들은 노동을 신성시한다>는 피터 게이의 논지에 어긋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그의 데뷔작 제목은 [한 게으른 녀석에 대한 게으른 생각]이다), 제롬은 게으름을 찬양하면서도 퍽 열심히 집필을 했다(...). 어쩌면 모순도 이 시대의 한 특징일지도 모른다. 부르주아들은 자기 계급에 자부심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빅토리아인들은 게으름뱅이의 운명이 허약함과 단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나태함이 산(酸)처럼 남성적 기질을 부식시킬 위험(?!)이 있다고 루스벨트가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의 복음은 전적으로 부르주아의 것이었으며 생계를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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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전]은 성, 종교, 노동, 가정, 사생활, 신경증, 공격성, 예술 등의 주제를 통해 빅토리아 부르주아들을 탐구하여, 이들이 그 내부에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건 적어도 20세기보다는 나은 덕성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의 성은 알려진 것처럼 보수적이기만 하지는 않았고, 종교적으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이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노동과 가정, 사생활을 중시하고, 새로운 생활 양식에 대한 불안과 공격성의 감소, 속물에 대한 혐오와 새로운 예술을 알아보는 안목이 공존했던-시대라고. 

피터 게이는 야만적인 20세기에 비하면 빅토리아 시대는 '좋은 시대'였다는 진부한 결론을 내린다. 진부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아주 설득력 없지는 않다. 이 책의 끝은 이러하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일기다.

"호텔에서 영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소식을 들었다. 세계 대전이다. 세계는 파멸한다. 끔찍하고 끔찍한 소식이다." 8월 5일 그는 충격 속에 일기를 썼다. 같은 날 그는 다시 기록했다. "우리는 세계사의 끔찍한 순간을 겪고 있다. 세계의 모습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변했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었다. 슈니츨러의 세기는 끝났다. 역사는 이 재앙에 대해 부르주아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류에게 이런 운명을 가져온 존재가 누구이든 간에 세계는, 그리고 중간계급의 세계는 결코 다시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부르주아전, 374p)




속도감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놓기가 어려운 책들이 있다. 이 책들은 어리둥절한 승객을 조수석에 태우고 질주한다. 승객들은 어쩔 도리가 없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창 밖의 풍경에 감탄하면서 여정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반면,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의 책이 있는데... 내밀하고, 상상하기 위해 자꾸 멈추어야 하고, 지루해지면 중간에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그런 책들. 너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니야, 뭐 그런 느낌의 불친절한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