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9일 수요일

[감상] 보트 위의 세 남자, 부르주아전

[보트 위의 세 남자] (제롬 K. 제롬, 문예출판사, 2004)
[부르주아전傳-문화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피터 게이, 고유경 옮김, 서해문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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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위의 세 남자]는 세 남자와 개 한마리의 보트 여행을 그리면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각종 우스운 에피소드를 나열해가는 소설이다. 심심할 때 야금야금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었다. 

내가[보트 위의 세 남자]를 읽게 된 것은 전적으로 코니 윌리스가 [보트 위의 세 남자]를 소재로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썼기 때문이다. 코니 윌리스는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첫머리에 "[우주복 있음, 우주 출장 가능함]의 작가이며 내게 처음으로 제롬 K. 제롬의 [보트 위의 세 남자,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소개시켜 준 로버트 A. 하인라인에게"라며 하인라인에게 다시 공을 돌린다. 그러므로 제롬 K. 제롬에서 시작하여 하인라인을 거쳐 코니 윌리스로 이어진 고리의 시작으로 거슬러올라가 본 셈이었다.

[부르주아전]은 추천받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의 일상사를 그려낸 책이었다. 사실 남의 일기장 들여다보는 기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딱딱한 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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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사실은 [보트 위의 세 남자]가 빅토리아 시대 작품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 책의 저자 제롬 K. 제롬은 1859년에 태어나 1927년에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부르주아전]에서 분석하고 있는 대상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생몰년도(1862~1931)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부르주아전]은 [보트 위의 세 남자]를 짧게 인용하고 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런 훈계를 살짝 비꼰 사람도 있었다. 영국의 유머작가 제롬(Jerome K. Jerome)은 1889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노동을 좋아한다. 그것은 나를 매혹시킨다. 나는 몇 시간이든 앉아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농담조차도 빅토리아 시대에 이 불굴의 신념이 내포했던 능력에 대한 찬사다.(부르주아전, 254-255p)

참고로 문예출판사의 [보트 위의 세 남자]에서 이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 생각에 나는 항상 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일을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 나는 몇 시간 동안이고 자리에 앉아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내 곁에 두고 싶어한다. 누군가 나에게서 그것을 뺏어간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중략)
나는 내 일에 매우 주의를 기울인다. 내 곁에 두는 어떤 일들은 몇 년 동안 내 소유였고 지문 자국 하나 없다.
(중략)
하지만 내가 일을 끔찍이 좋아한다고는 해도, 나는 공명정대한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게 할당되어야 할 정당한 양 이상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다.(보트 위의 세 남자, 211-212p)

겉보기에 제롬은 <빅토리아인들은 노동을 신성시한다>는 피터 게이의 논지에 어긋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그의 데뷔작 제목은 [한 게으른 녀석에 대한 게으른 생각]이다), 제롬은 게으름을 찬양하면서도 퍽 열심히 집필을 했다(...). 어쩌면 모순도 이 시대의 한 특징일지도 모른다. 부르주아들은 자기 계급에 자부심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빅토리아인들은 게으름뱅이의 운명이 허약함과 단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나태함이 산(酸)처럼 남성적 기질을 부식시킬 위험(?!)이 있다고 루스벨트가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의 복음은 전적으로 부르주아의 것이었으며 생계를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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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전]은 성, 종교, 노동, 가정, 사생활, 신경증, 공격성, 예술 등의 주제를 통해 빅토리아 부르주아들을 탐구하여, 이들이 그 내부에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건 적어도 20세기보다는 나은 덕성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의 성은 알려진 것처럼 보수적이기만 하지는 않았고, 종교적으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이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노동과 가정, 사생활을 중시하고, 새로운 생활 양식에 대한 불안과 공격성의 감소, 속물에 대한 혐오와 새로운 예술을 알아보는 안목이 공존했던-시대라고. 

피터 게이는 야만적인 20세기에 비하면 빅토리아 시대는 '좋은 시대'였다는 진부한 결론을 내린다. 진부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아주 설득력 없지는 않다. 이 책의 끝은 이러하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일기다.

"호텔에서 영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소식을 들었다. 세계 대전이다. 세계는 파멸한다. 끔찍하고 끔찍한 소식이다." 8월 5일 그는 충격 속에 일기를 썼다. 같은 날 그는 다시 기록했다. "우리는 세계사의 끔찍한 순간을 겪고 있다. 세계의 모습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변했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었다. 슈니츨러의 세기는 끝났다. 역사는 이 재앙에 대해 부르주아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류에게 이런 운명을 가져온 존재가 누구이든 간에 세계는, 그리고 중간계급의 세계는 결코 다시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부르주아전, 3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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